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문단 편집) === [[부르봉 왕정복고]] === [[파일:Marie Thérèse Charlotte.Duchess of Angouleme.png|width=400]] [[루이 18세]]가 자녀없이 사망한 이후 둘째 작은아버지 아르투아 백작이 [[샤를 10세]]로 즉위했다. 이에 샤를 10세의 장남 [[루이 19세|루이 앙투안]]의 아내 마리 테레즈는 앙굴렘 공작부인에서 프랑스의 왕태자비가 되었다. 당시 마리 테레즈는 [[루이 16세]]의 유일한 자식에 마담 루아얄(장공주)이자 마담 라 도팽(태자비)이라는, 프랑스 왕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신분으로 등극했다. [[살리카법]]만 아니었다면 당장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고도 남았지만, 동생 [[루이 17세]]가 혁명 때 어떤 꼴을 당하다 죽었는지 보면 살리카법 덕에 그 지위를 가지고도 다행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어린 시절에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 밝은 성격의 소녀였다고 전해지지만 혁명 기간 동안 감옥에 갇혀 공포와 멸시와 외로움, 추위 속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다 보냈고, 망명 생활을 통해서는 가증스러운 꼴만 보며 외국을 떠돌고 평생 고생 아닌 고생까지 다 한 탓인지 매우 [[냉혈한|냉혹하고 변덕스러우며]] [[경계성 성격장애|메마른 고압적인 성격으로 성장했다]].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평온하고 품위 있게 속삭이던 것과는 달리, 마리 테레즈는 감옥 생활에서 얻은 발성장애까지 더해져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쉴새없이 분노의 고성을 토해냈다고 전해진다. 민중의 여론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마리 테레즈에게 비교적 동정적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을 감옥에서 썩게 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어머니]], [[루이 16세|아버지]],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고모]], [[루이 17세|남동생]]까지 죽인[* 실제로 혁명파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어린 [[루이 17세]]를 학대/세뇌시켜 ‘어머니가 나를 [[강간]]했다’ 라는 진술을 받아내게 만들었다. 당시 옆나라 [[영국]]에서도 ‘어떻게 왕과 왕비를 목 잘라 죽일 수가 있냐'고 프랑스를 야만적으로 보면서 양국의 사이는 더 나빠졌다. 하지만 사실 그 부분에선 영국이 프랑스를 뭐라 할 일이 못 되는 게, 프랑스가 왕 목 날리기의 선두주자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의외로 그 일은 영국이 [[잉글랜드 내전|144년이나 먼저 했다.]]] 민중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마리 테레즈는 평생 극렬 왕당파 보수주의자로 살면서 혁명도 증오하고[* 특히 그녀가 프랑스 혁명 동안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을 적은 일기에서도 혁명 세력을 전부 악당으로 묘사했다.] [[백색테러]]도 자주 일으켜서 민중의 미움을 받았다. 정작 부모인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형 직전에 남긴 서신이나 유언을 보면 양쪽 모두 자신들의 처형으로 인해서 더 이상의 희생과 폭력이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이러한 유지를 살아남은 자녀에게 남기려고 했으나 마리 테레즈는 결국 성장기에 받은 너무도 큰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것. [[시민혁명]]으로 타도되었다가 외국의 도움으로 겨우 돌아와서 혁명 세력과 어느 정도 타협할 수 밖에 없던 [[부르봉 왕조]] 입장에서도 마리 테레즈의 복수는 결코 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 왕가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고귀한 신분이다 보니 숙부인 [[루이 18세]]조차 그녀를 통제하기 어려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